I.서론
 20 세기 후반부부터 많은 선교 학자들은 21 세기를 향한 선교 동향을 서양 교회 주도의 선교에서 제 삼 세계 교회 주도의 선교 시대로 보고 있다.
Ralph D. Winter 박사는 ‘Four Men, Three Era, Two Transitions: Modern Mission’ 라는 글에서 근대 선교를 3 시대로 구분하여 첫 시대 (1792-1910) 는 William Carey가 주도하였고, 주로 구라파 교회가 담당한 해안 선교 시대였고,
두 번째 시대 (1865-1980)는 Hudson Taylor가 주도하고 주로 미국 교회가 담당한 내지 선교였으며,
세 번째 시대(1934- 현재)는 Donald McGavran 과 Cameron Townsend가 주도하였고 주로 제 삼 세계 교회가 담당하게 될 ‘간과된 이들’ 혹은 ‘Hidden People’을 위한 선교 시대 라고 하였다.
(Ralph D. Winter and Steven C. Hawthorne, ed.,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Pasadena, California: William Carey Library, 1992, pp. 33-44).

이러한 선교 학자들의 예측대로 그 동안 선교 운동과 선교 단체를 주도해 온 서양 교회들의 활력이 911 사태를 기화로 점점 그 빛을 잃어 가며, 이제는 제 삼 세계, 즉 남미 교회나 인도 교회, 중국 교회, 한국 교회가 그 역할을 주도해 가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특히 2/3 세계 중 가장 큰 영적 부흥과 양적 성장을 보여온 한국 교회의 선교는 앞으로 세계 복음화를 이끌어갈 주역으로 주목 받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와 더불어 대두되고 있는 것이 여성 선교사들의 위치와 영향력이다. 이미 과거에도 여성 선교사들의 영향력과 활동은 컸음에도 불구하고 알려져 있지 않거나 남성 선교사들의 활동에 가리워져 한낱 조력자로만 인식 되어 있었다.

그러나 21 세기를 들어와 일반 여성들의 지위와 영향력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사람, 교회, 세상에 크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 상식과 현실이 된 이 시대에서 여성 선교사의 중요성과 필요성 또한 크게 대두되고 있으며 실제로 세계 복음화에 있어서 막대한 공헌을 해오고 있고,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재 인식하고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 선교를 말할 때 여성 선교사를 빼고는 전략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계 선교를 추진하는데 여성 선교사들이 중요한 원동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있어서 평균 4 가족 당 1 명이 여성 선교사가 파송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특별히 이슬람 국가에서의 여성 선교는 매우 필요하고 중요함을 느낀다.
이슬람 세계관에서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고, 물건이나 다름이 없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있어서는 여성에게 남성들이 다가가는 것이 불가하기 때문에 여성과 어린이 선교에 반드시 여성 사역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대적 요구에 따라 2/3 세계 교회의 선교와 여성 선교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 선교 역사에 있어 많은 공헌을 한 여성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총체적, 개별적으로 살펴 보는 것은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또한 필자가 이러한 연구를 하게 된 목적은
첫째, 초기 선교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여 선교사님들의 선교 모습을 확인하고, 그 노고와 수고를 기리기 위함이고,
둘째는 한국 여 선교사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며,
셋째는 이 연구를 통해 우리 자신의 거울로 삼아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역의 방향성과 전략을 갖기 위함이다.
본론 부분에서 필자는 초기 한국 선교 시대인 1880 년대 조선 선교를 위해 외국에서 온 여성 선교사님들의 주된 사역인 교육과 의료 사역이 기독교 교육과 여성 교육의 효시가 되어 근대적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유교에서 나오는 가부장적 사상과 '남존 여비' 문화의 피해자로 존재했던 여성의 위치를 오늘날 여성의 위치로 끌어 올린 기초가 되었던 것을 확인할 것이다.
또한 한국 여성으로서 시대적 어려움과 난관을 뚫고 선교사로, 교육가로, 의사, 여성 운동가로 활약했던 여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살펴 보고 귀중한 사역과 순교였음에도 그 이름 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수 많은 여 선교사님들의 수고와 노고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열악한 환경을 헤쳐 나가며 오지에서 피와 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현지인들을 위해 자신의 젊음과 삶을 불태우지만 여성이라는 어려움을 안고 있는 여 선교사님들을 소개함으로 여성 선교사로서의 정체성과 선교적 장, 단점을 알아보고 거기에서 나오는 선교 전략과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써 한국 선교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했던 여성 선교사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이를 통해 현재 선교지에 나가 있거나 앞으로 선교지로 나갈 여 선교사들의 정체성을 자각시키며, 그 중요성,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삶의 가치와 목적을 잃지 않는 선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II. 본론- 여 선교사들의 사역과 영향

100년 한국 기독역사를 돌이켜 볼 때 ‘여성을 포함한 역사’ 라기 보다는 ‘여성을 끼워 넣은’ 서술에 불과 했다고 보여진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언제나 여성이 있었고 그 여성들의 중요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온 것은 가부장적 시대의 흐름 속에 자각되지 못하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고 리더의 위치에 오르는 경우가 과거보다 늘어 나면서 선교에서 또한 여성들의 필요와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그 시대의 가부장적이고 남성 위주 사회라는 특성 때문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모든 분야에서 특히 기독교 교육이나 여성 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여 선교사님에 대한 역사적 고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다음에서는 초기 한국으로 온 외국 선교 단체들에게 파송된 외국 여 선교사들의 사역과 한국 여성으로서 교육과 의료, 여성선교에 힘쓴 여 선교사, 그리고 한인 여성으로서 타 문화 선교지로 파송된 여 선교사들을 통해 현 여 선교사들의 위치와 역할, 그 나아갈 바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조선으로 파송된 외국 여 선교사들의 중심 사역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에 해외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시기는 미국의 선교역사와 맛 물리는 시기였다. 이때 파송된 여 선교사들은 입국 초기부터 전체 선교사의 근 60%이상을 점하고 있었으며, 1885년부터 처음 10여 년에 걸쳐 조선 민들에게는 경계를 늦추게 하고 미국인들에게는 한국 문화에 대한 문화제국주의적 편견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한국 문화 지킴이 (cultural gatekeeper)기능을 담당 하기도 했다. 188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에 주재해 있던 북미 출신 선교사들에 대한 통계를 보면 총 선교사수는 1,559명이었으며, 이중 영국, 호주, 스웨덴, 독일 등에서 왔던 선교사들을 제외한 북미 출신 선교사들의 총수는 1,187명이었고 그 중 남 선교사는 621명, 여 선교사는 566명이었다. 또한 내한하여 조선에서 활동했던 기관들을 분야별로 보면 교육기관에서 활동한 여성이 45.4%, 사경회 및 성경학교가 32.8%, 의료기관이 19.4%, 복지관이 7%로 성경학교를 넓은 범위의 여성교육분야에 넣을 경우 대부분이 교육분야에서 일했던 여성들임을 알 수 있다. (강선미, 2003 연구 모임 주제 발표) 이처럼 전체 선교사의 거의 반을 차지했던 여 선교사들은 주부, 또는 전문직 여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남성뿐만 아니라 그 시대 무지하고 비참한 생활 속에 있던 조선 여성들에게 의식 구조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옴과 동시에 한국 교회성장의 초석을 마련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1) 교육사역
급변하는 내외 정세 속에서 외국 선교사들이 내주 하여 그들의 선교활동을 교육중심으로 시작했다. 그들이 선교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던 교육은 학교교육과 더불어 교회교육, 사회교육, 유아교육, 특수교육 등에 관한 것으로서 우리 나라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기에 충분했다. (김득룡,“한국 기독교 교육 운동사,” 한국기독교 성장 100년, 서울: 기독교 문사 ,1986,80) 이런 활동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여러명의 여 선교사 중 3명 - 스크랜톤 부인, 페인 여사, 그리고 캠벨에 대해 소개 하고자 한다.
l 메리 F. 스크랜톤 여사(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미국 북 감리교 여 선교부 선교사로서 이화여대 및 동대문 이대 병원을 설립한 분이다. 그녀의 남편 윌리암 B. 스크랜톤(Scranton, William Benton, 1856∼1922)도 미 감리교회 의료 선교사로서 뉴욕의대를 졸업, 감리회 의료원 창설 선교사였다. 스크랜톤 여사는 믿음으로 사는 여성이었다. 50이 넘어 조선땅에 선교사로 온 그녀는 남은 생애를 보람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남들 보다 더 동분서주 움직였다. 조정의 눈치보다는 사역이 중요하게 여겨져 일을 만들어 갔다.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울 계획으로 서울 정동에 큰 집을 구해 놓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학생모집은 되지 않았다. 1886년 첫 학생으로 여남은 살 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끼니가 없어 굶다가 먹여 살릴 수가 없어 보내진 아이였다.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함께 기거했다. 이 아이가 이화여대 첫 학생이며 이렇게 한 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시작한 것이 결국 이화학당이라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학교를 창립한 것이다. (Ibid. 82)
l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1869~1909)
미국 메사츄세츠주 보스턴에서 출생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고 1893년 제3대 이화 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 간 여성 교육에 이바지했다. “여자가 공부는 해 무엇 하느냐”하는 시절에 여성 교육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Lessons on the Human Body 라는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1899년 한국 최초로 프라이(Frey)와 공동 저술했다. 1904년 9월 중학과 (중등 과정)를 설치하였으며, 교과과정(敎科課程)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이 같은 체육운동 때문에 양반층에서 처음에는 크게 반발하고 “집안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도 엄하게 훈육하여 학생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까 학생들이 팥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 먹이기도 한 무척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자료: 이화70년사) 그녀의 열정적인 설교와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40세를 일기로 1909년 9월 25일 해주지방 전도사업 순회 중 콜레라로 별세하였다.(선교문화신문 2004-11-07, 126 호)
l 조세핀 P.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1853~1920)
남 감리회 해외 여 선교부 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45세인 1897년 10월9일에 그녀의 중국인 양녀 여도라를 데리고 한국에 도착했다. 그 후 1898년 여학교 ‘배화학당’의 전신을 창설하고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 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는데 이 교육은 춤을 추듯 한다 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1900년에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이라 하여 오늘날의 종교 교회와 자교 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안식년 때 얻은 신병으로 한국에 돌아와 악화되므로 1920년 11월 12일 별세 했다. 그의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교문화신문, 신호철 장로,2004-11-29, 128 호)
2) 의료사역
외국 선교사가 조선 땅에 와서 한 중요한 사역 중 하나가 바로 의료 사역이다. 그 당시 비 위생적 환경에서 오는 전염병과 여러 질병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며 오히려 환자는 고치면서 자신은 그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거나 자식과 배우자를 잃는 아픔을 겪는 선교가 많았다. 이렇게 희생적이며 헌신적 사역을 한 대표적 여 선교사 3 분을 소개한다.
l 로제타 홀 선교사 (Hall, Rosetta Sherwood, 1865∼1951)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펜실베니아 여 의대 졸업, 상동시 병원, 평양 기홀 병원을 세웠다. 로제타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 사랑을 실천해 갔다. 평양 기홀 병원에 근무하고 여자 환자를 위한 광혜 여원을 개원 하였으며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였으며 처녀 때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New York Point)을 배운 적이 있는 그녀는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할 때 오씨라는 보조원의 어린 딸인 봉래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맹인 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 학교 평양 맹인 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후에 맹인 학교를 확충하여 농아 교육도 시작하였다. 박 점동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 경성여자 의학 전문 학교를 설립하여 지금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43년간 한국 사역을 인정받아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논문:"위생 의복론", 〈예수교신보〉, 1907. 11. 13~11. 27;"기초적 위생", 〈기독신보〉, 1916. 7. 26~8. 22. -저서: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1897(노병선 역, 《賀樂醫員史蹟》, 1897;현종서 역,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 도서출판 에이멘, 1994).
l 데이비스 선교사(1862~1903)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로 온 선교사 중 처녀 선교사는 데이비스와 메티 선교사 둘 이었다. 한국에 도착하여 호남선교를 준비하며 각 지역을 전도했다. 1896년 군산으로 가서 부인과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작하고 학교 사역을 가당하였다. 그 후 전주로 이전하여 헤리스 선교사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선교 했다. 한 해에 1885명을 전도하는 열매를 맛보기도 하였는데 전주 예수 병원에서 입원해 있는 어린 아이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돌보다가 그녀는 열병에 전염되고 말았다. 결국 데이비스는 그 병으로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20일 소천 하였다. 동료 선교사들은 그녀를 가리켜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라고 하며 애도했다. 그녀는 호남지방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한국 장로 신문 2004, 12-18, 980호)
l Underwood, Lillias Stirling Horton M. D., 1851-1921
언더우드 1세의 부인 릴리아스 호튼 박사는 조선을 찾은 첫 서양 여의사로 명성황후의 전담 의사로 활동하는 등 숨질 때까지 한국에서 의료활동을 하였다. 언더우드 가문의 4세인 원한광 박사는 2004년 11월 38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면서 ‘언더우드가의 여성’이란 영문 기고문을 중앙일보에 보냈다. 그에 의하면 그녀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향 시카고를 떠나 멀고 위험한 한국을 찾아 1921년 숨질 때까지 의료활동을 했다. 명성황후를 비롯해 왕족과 양반계급 여성들을 전담했다. 당시 미국에도 여의사가 적었으니 그가 한국의 많은 여성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릴리아스는 서양의학을 한국에 소개했으며 여성도 남성처럼 똑똑하고 결단력 있고 교육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것, 사회에서 독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한국 여성에게 일깨워 주었다. 그녀 외에도 언더우드2세 부인 에델 반 와그너는 서울 외국인 학교를 시작하고 에델 언더우드 소녀 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49년 4월 집에 침입한 4명의 청년 테러 리스트에 의해 살해됐다. 언더우드 3세의 부인 조운 데이비슨은 서울 외국인 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내고 55년부터 76년까지 연세대 영문과에서 영어 회화와 글쓰기를 가르쳤다. 53년 그는 포켓 사전을 만들어 외국인들이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 어떤 단어들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4세 낸시는 연세대 영문과 교수로 한국 학자들을 위해 영문으로 된 책들을 편집하고 수정했다.(중앙일보 기사 2004,11)
l 그 밖의 양화진의 의료 여 선교사
** Bunker, Annie Ellers R. N., 1860∼1938 미 북장로회 선교사
보스턴의과대학 재학 중 내한, 광혜원 여의사, 민비의 시의, 알렌의 보조 의사
** Pieters, Eva Field, 1868∼1932북장로회 여 의료선교사, 노스웨스턴 의대 졸,
** Jacobsen, Anna P., 1868∼1897 북 장로회 간호 선교사 제중원에서 에비슨 보조
** Young, Mable Barbara, 1883∼1935 캐나다 장로회 간호선 교사 미국 세인트 룩크 병원 간호 학교 졸업, 구세 병원 간호사(Internet 자료)

2. 한인 여성 선교사들의 사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외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의 부인과 여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해 연구하는 것만큼 간과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한인 여성 선교사들의 사역이다. 외국 여 선교사들이 한국 여성을 위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언어에도 익숙지 않고 한국의 전통과 풍습 속에서 복음의 한계를 느껴가는 자신들에게 언어를 가르쳐 주며 또 전도 대상의 안방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한인 ‘전도부인들(Bible Women)’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간 기독교 행동하는 신앙, 전도의 열풍을 품은 개척자2000) 또한 서양 여 선교사들의 권유로 외국으로 나가 한인 여성으로는 처음 서양의술과 서양 교육을 배우고 돌아와 비 위생적 환경과 비 교육적 환경에 있던 많은 조신인, 특히 여성들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친 많은 한인 여 선교사들 돌아보고 그 공헌을 말한 다는 것은 현재의 나와 같은 여성이 있게 된 초석의 역할이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1) 전도부인의 활동과 의미
한국교회사에서 숨겨졌던 여성들, “전도 부인들(Bible Women)”의 이야기는 한국교회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전도부인들의 헌신 없이는 한국교회가 오늘날과 같이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고 단언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Bible Women”이라 불렸던 전도부인들이 생겨난 것은 1890년대 이후로 당시 여 선교사들에게 전도부인의 역할이 절실히 요구되던 터였다. 한국인 여성들에게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이나 복음이 담긴 소책자를 판매하였다. 대개 그들은 과부거나 남편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데 없는 여인들인 경우가 많았다. 유교적 관습 속에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던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은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돌파구였으며 또 실질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매달 5원 가량의 급여를 받았던 것은 그들이 판매한 성서나 소책자를 판 대가였다. 또한 그들은 외국 여 선교사들과 만남을 꺼리는 한국 여성들의 안방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하고 도시 교회 에서 주일학교의 관리와 주일학교 교사, 결석자 방문과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을 다시 나오게 하는 목사의 보조자로서의 일도 했으며 여성 성경반이 열릴 때 그것을 운영하고 가르치며 새벽기도 모임을 인도하고 다른 교회의 사경회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런 전도부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장로교에서는 단기 성경학원을 시작하여 1910년에는 정식으로 여자 성경학원으로 발전해 계획적인 교육을 시도하였고 보다 높은 수준의 학교에 대한 요구가 생겨나 3년의 교육과정으로 짜여 있는 고등 성경 학교가 시작 되었다. 성서의 모든 책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전도의 경험을 통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강조점이 주어졌고 1902년9월에는 감리교에서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의 일이나 남자 목회자의 일을 넘어설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부인들의 역할이 충분히 인정 받을 수 없었다. 전통적인 여인의 미덕, 즉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순종하는 여전도인 상을 강조함으로 차별 받고 억압받는 위치에 스스로 만족하고 머물러 있도록 유도했다. 유교적 관습이 팽배하던 시기, 남녀평등 사상과 인격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한국여성의 인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던 전도부인은 복음 전파 외에 문맹의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의식에 새로운 자극과 깨우침을 준 것 또한 그들이 한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더 나아가 여성해방운동과 구국운동에 나섰으며 농촌 계몽운동, 절제운동, 금주, 금연 운동 등에도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초적 바탕 위에 드디어 1931년 14명의 첫 여자 목사 안수가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주간 기독교, 2000, 김진아)

2) 의료사역: 최초의 여의사와 그 후계자들
l 박 에스터(1876~1910):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의사가 등장한 때는 1900년
이었다. 박 에스터(본명 김점동). 그녀가 바로 남자들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서양 의술을 맨 먼저 익혀 귀국한 여성이었다. 이화학당에 들어가 교육을 받던 중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인 그녀는 보구 여관에서 통역 겸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여의사 로제타 홀이 소개한 박유산과 결혼하여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지금의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졸업, 귀국하여 보구여관에서 일하다 1906년부터는 광혜 여원에서 헌신적으로 홀부인과 일했다. , 영어교재를 한글로 번역하는가 하면 성경과 위생을 여성들에게 가르쳤다. 말 그대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맡아 지역 사회 여성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34세의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김은신/소설가, 사료 연구가, 김진형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l 그 외의 여의사들: 주 분야 산부인과와 소아과
한국에서 여자의사 양성을 위한 근대 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은 1890년 외국인 선교사인 ‘홀’부인이 이화학당 졸업생 5명에게 의학을 가르치면서부터이다. 이것이 1928년 경성 여자 의학 강습소로 발전되어 강성자, 김금선, 김동숙, 박순정, 송경애 등을 배출하였고, 1933년부터는 한성 의사회 회장인 김택원과 그의 부인 의사 길정희가 인수, 경영하였다. 1941년 7월에 경성 여자 의학 전문 학교의 허가가 나서 여성의사 양성을 위한 교육 체계가 더욱 확고해졌다. 이렇게 배출된 여의사들이 담당했던 주 분야는 산부인과와 소아과였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출산과 아이의 건강을 보살피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었으므로 이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유교적인 내외 법 등 봉건적 가부장제가 여전히 존재해 있던 일제 사회에서 여성 환자들은 여의사가 맡아 돌봐줘야 했다. 특히 출산과 관련된 산부인과 진료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결국 여의사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시 여성과 아이들의 보건 향상에 커다란 디딤돌 역할을 한 것이다. (서울여대 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신 영 숙 (문화병원))
3) 여성 운동
전도부인의 영향과 발달 과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 할 수 있다. 선교초기 선교사들의 보조자로서의 입장에 서 있던 전도부인들과 1910∼30년대 교회조직의 확장에 주역을 담당하는 자로서의 전도부인들, 그리고 30년대 중반 이후 가부장적 교회 구조에 저항하기도 하는 자로서, 그리고 문맹퇴치와 여성 계몽운동, Y.W.C.A, 절제 운동, 민족 운동등 적극적인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던 지도자로서의 입장에 서 있던 여성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l 차마리사 (1880~1955): 여성 운동가, 교육가
차미리사 여사는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1905년 여 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수주에 있는 버지니아 여학교를 다니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와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 하고 캔자스주의 더스칼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로 귀국하여 배화여학교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했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에 여자 야학 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힘썼다. 1920년 조선 여자 교육협회를 조직하고 근화 여학교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덕성여자 초급대학(현 덕성여대)을 설립하였다. 차 마리사 선생은 "교육은 인생의 생명이다. 자녀는 부모의 생명을 연장하고 교육은 인생의 생명을 완전하게 한다"는 신념 하에, 식민지 조국의 독립과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요 여성 민족교육의 선구자였다. 차 마리사 선생은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는 수단으로써 여성 교육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먼저 자각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지식발전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씨 뿌리는 여인 한국 인물대계 9 )
l 전밀라 (1908. 10. 15 ~ 1985. 10. 30): 한국 최초 여자 목사 안수, 여선교회
전밀라는 한국 여자로서는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인물이다. 영명여학교,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1935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동부연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임명 받았고 1939년에는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1년간 수학하고 돌아왔다. 1955년 3월 13일 한국에 개신교 복음이 들어온 지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자 목사가 되었다. 이 날은 한국 감리교회뿐 아니라 한국 기독교여성운동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갖는 날이다(한국에서 이루어진 첫 번째의 여자 목사 안수는 1931년 감리교연회에서 여 선교사들에게 주어졌다. 1951년 재건교회의 최덕지가 목사로 안수 받기는 했지만 개인적 카리스마에 의한 것이라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1977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은 1996년에 여자 목사가 배출되었다). 그는 양광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979년 정년으로 은퇴 하였고 오랜 병고 끝에 1985년 10월 30일 별세하였다. 전밀라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평생을 독신으로 생활하면서 목회와 여선교회 사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감리교회의 일꾼이었다. 또 그는 남녀차별의 봉건적 구조를 깨기 위해 자기 스스로가 선구자의 길을 걸은 여자 목사였다.
-저서:《또 다시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독교 대한 감리회 양광교회, 1986.
l 유각경 (1892~ ): Y.W.C.A.개척자, 유아교육의 효시
1892년 서울에서 태어난 유각경은 정신여학교 보육과를 졸업하고 장로교 여 선교사의 추천으로 중국 북경에 유학, 협성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모교 정신여학교 교사로 봉직하였으나 사임하고 1918 년 이해영과 결혼하면서 서울과 개성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다가 1922년 남편이 유학의 길을 떠나자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Y.W.C.A 운동과 절제 운동을 펼쳤다. 그리하여 한국 Y.W.C.A 창립 대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유각경은 Y.W.C.A를 암울하던 당시 여성사회의 빛이 될 단체로 꾸려나갔다. 1924년 상행 Y.W.C.A가 임대하고 있던 태화 여자관 안에 유치 원을 개원하여 운영함으로써 우리나라 유아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933년 Y.W.C.A가 일본 Y동맹에 통합되자 퇴진하였다가 1945년 해방과 함께 Y.W.C.A 운동도 부활시켰다. 그녀는 1966년까지 이 운동을 줄기차게 밀고 왔다. 그녀는 예장 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1947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여자 기독교 절제회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타국의 절제회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돌아왔다. 그녀는 한국의 여명기에 여성 지위 향상과 절제 운동의 꽃으로 역사에 점철되었다.


l 김활란(1899. 2. 27~1970. 2. 10) : 여성교육 운동가.
세례명 헬렌(Hellen).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기독교적인 신앙교육을 받았고 이화학당을 제5회로 졸업하였다. 1920년 홍에스더, 김함라, 윤성덕, 김폴린, 김애은, 김신도와 함께 “이화 7인 전도대"를 조직해서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계몽강연을 열었다. 또 유각경과 함께 조선여자 기독교 청년회 (YWCA)를 창설하였고 웨슬리안대학,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콜롬비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보스턴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36년부터 가중된 일제의 기독교학교 탄압과 신사참배의 강요로 제7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 학교 이사장까지 겸임하게 된 김활란은 학교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정신대 독려 강연 등 일제의 시국정책에 협조하는 일생의 최대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그후YWCA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1965년 "전국 복음화 운동의 해"로 선포하고 한국을 복음화하는 운동을 제안, 주도하며 다락방교회를 세웠다. 1964년 미국 웨스턴하우스의 타임캡슐에 넣을 자료편찬을 위한 교육부 위원으로, 세계적 편찬위원 33인 중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임되었다. 1970년 별세, 정부는 그의 영전에 대한 민국 외교 공로장 최고훈장을 추서하였다.-저서:《우월 김활란 자서전 그 빛 속의 작은 생명》, 여원사, 1965

3. 타 문화권 선교지로 나간 여 선교사들
한국 교회는 그 설립 초기부터 선교하는 교회였다. 또한 그 출발부터 기독교 선교 운동의 특징인 부흥운동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일어났다. 이러한 선교의 아름 다운 전통과 역사 속에는 세계 복음화의 거대한 자원들이 있었고 교육, 개발되어져 왔다(박기호, 한국 교회 선교 운동사 서문p9). 여기에 선교 초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외에 타 문화권으로 파송되어 그 곳 현지인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섬기고 헌신하였으며 또한 현지 지도자를 양성하고 여성을 위해 여 선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들로 여성문화와 생활에 영향을 끼친 여 선교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들의 사역과 영향력을 발판 삼아 미래 타 문화권 여 선교사들의 거울과 본보기가 되고 좀 더 효과적인 선교 전략과 방향을 모색함이 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l 최나오미(1873.11.19~1949): 한국의 첫 해외 여성 선교사(시베리아)
전도부인의 대표적 인물로서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냉대와 핍박 속에 있다가 1900년부터 전도부인의 직함을 받아 본격적으로 전도에 나서게 되었다. 선교사 하디 가족과 함께 그리스도로 인해 박해 받는 이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는 데에 더 없이 좋은 인물이었다. 후에 체계적인 신학 수업을 받고 1911년에는 협성 여자 신학교 교사로 봉사 하였으며 개성에서 전도부인, 서울에서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또한 1920년 ‘남감리교회 조선 여선교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선교사업 추진 시베리아 선교사로 선정되어 해외에 파송된 최초의 한국인 여 선교사가 되었다. 신한촌, 니콜스크, 블라디보스톡, 연추, 북간도지역 순회 전도를 하였으며 러시아혁명으로 기독교 박해가 가중되던 때에도 여성의 몸으로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1933년 개성 북부 교회에서 회갑을 맞아 “최나오미 전도사업 33주년 기념식”을 열었고 1949년 77세로 별세하였다.(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l 김순호(중국 1931-1939).
그녀는 한국 여성으로서 타 문화권에 파송 받은 선교사이며 순교자 1928년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창립 후, 첫 번째로 해외선교를 위해 김순호 여 선교사가 1931년에 파송되었다. 교단 총회의 인준과 여전도회 인준을 받는 유일한 선교사였다. 단신의 젊은 여성의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여성의 목회를 인정받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전도회는 해외선교의 큰 몫을 잘 감당한 결실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여전도회의 선교사업을 통해 한국교회에서 여 전도 회원의 역할과 교회내의 지도력과 위상을 차츰 드러내 주셨다. 이에 교단 총회는 매년 총회장의 메시지를 발표하고 전국교회에 공문을 보내어, 모든 교회가 해마다 여전도회 주일을 실시하며 기도로 격려하고 헌금하여 여전도회의 선교사업을 위하여 재정적인 후원을 하도록 적극 돕고 있다. 6.25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 51세로 공산 당원 들에게 순교를 당하였다.(Copyright(c)2001~ by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l 전재옥(파키스탄, 1961-1974)선교사
이화여대 일문과를 졸업하고 University of London 신학부를 졸업했으며 풀러 신학교 선교학 석사, 박사, 현 이화여자 대학교 인문과 대학 기독학과 선교학 교수로 있는 전재옥 박사는1961년 두 명의 동료 선교사와 함께 처음으로 이슬람권 파키스탄에서 사역을 하였다. 현재 이슬람 연구소 이사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독립 후 최초의 독신 여성 선교사로서 한인 여성 선교사의 모델이 되었고 파키스탄의 우르두어와 문화를 습득한 후 교육, 성경공부, 신학교육, 여성 지도자 양성 사역에 기여하며 모슬렘 선교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현재 한국 모슬렘 연구소를 설립하여 모슬렘 선교에 기여하고 있다.(박기호, 한국 교회 선교 리더십 30년 역사) 그는 선교 타임즈의 한 인터뷰와 국제 선교학회(IAMS: International Association Mission Studies)에서 ‘비움의 선교학’을 강조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아시아 무슬림 세계에 속한 여성들의 삶은 비참하게 당하고 살 수 밖에 없는 가려진 얼굴들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감싸 안으며 사랑을 줄 수 있는 복음을 가진 여성 선교사가 필요하다.”라고 역설했다. 즉 가장 약하지만 또한 강한 한국 어머니상을 이슬람권 선교사의 또 다른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빌립보서 2장 6~7절 말씀(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의 예수와 같이 자기를 비우는 것이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선교의 핵심임을 말했다.
l 심숙경 터키 선교사
1994년부터 5년간 터키에서 사역했던 그녀는 ‘이슬람권에서의 여성사역’이란 주제발표에서 “천년 이상 아랍인들의 삶 속에 확고히 자리매김한 이슬람의 ‘틀’ 그리고 기독교와의 오랜’마찰’ 등이 무슬림 전도의 가장 큰 적이라고 단정했다. 남성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여성들에 포커스를 맞추며 성차별이 엄격한 이곳의 여성들을 전도하는 길은 여성 선교사를 통한 길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들을 향한 여성 선교사들의 관심을 부탁했다. 또한 그는 지금은 이슬람사회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적지만 이곳의 아내와 엄마가 복음으로 변할 때 이 사회가 세밀한 부분까지 변할 수 있다고 여성 선교의 중요성과 여성 선교사들을 통한 선교전략이 대안이라고 말헀다.(기독교민신문2004)
l 김영애(62) 필리핀 선교사
그녀는 1999년 20년여년간 몸담은 대학 강단과 교회를 뒤로하고 ‘세계사랑 나누기 선교회’ (www.nanygi.org)를 세우고 필리핀으로 왔다. 파나이섬에서 필리핀판 새마을운동이 펼쳐 지며 과거 뿌리 깊게 박혀있던 ‘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이 사라지게 된 것은 믿음으로 선교 현장을 지킨 그의 역할이 크다. 과거 척추 카리에스에 시달리며 썩은 척추 뼈에 엉덩이 뼈를 이식하고 일부 왼쪽 갈비 뼈까지 제거해야 하는 무서운 병마에서 하나님과 깊고 신비한 체험을 하고 난 후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교지로 올 수 있었다.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오토바이에 매달려 비포장길을 가야 할 때면 거룩한 울보가 된다는 그는 일시적 구제보다는 농업, 축산업, 교육을 통해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새마을 운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카투빅 마을에서 시범농장을 운영하고 최신형 우물 파는 기계로 물이 절대 부족한 마을에 우물 파주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 (국민일보 2003.12. 함태경기자)

4. 한인 여 선교사들의 현재 위치
여성은 세계 복음화에 막대한 공헌을 해 오고 있다. 신,구약 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선교사역에서 많은 일들을 잘 감당하고 이룬 업적들이 있고 그 숫자 또한 많다. 한국의GMS만해도 여성 선교사 중 독신 선교사는 114명, 사모 선교사는 약 450명 등 여성 사역자 수는 500여명을 넘고 있다. GMS 선교사의 수가 총 1035명임을 고려해 볼 때 여성 선교사 수는 50%를 능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성 선교사들의 사역 종류는 교회 개척, 신학교 교육, 성경교육, 제자훈련, 어린이 사역, 기술 사역, 부녀자 사역, 청소년 사역, 의료사역 등 남성 사역자들과 다를 바 없이 사역하고 있고 많은 남성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GMS 주 이집트 선교사 김신숙 ‘여성 리더십’ 주제 발표) 그러나 아직까지 여성 선교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부인 선교사와 독신 선교사의 대한 어떠한 규정과 사역, 자격도 분명하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목사 선교사의 지도 하에 돕는 한 부분으로 되어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몇 년 전 선교회가 현지 경험을 하고 들어온 선교사들이 본부 사역을 하면서 변화된 것 중 하나가 바로 부인 선교사에게 선교사로 인준을 하고 파송장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기준이 정확하게 되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찍 선교지로 나간 사람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여성 선교사에 대한 특별한 정책이 없다. 말하자면 남, 녀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는데도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선교사는 남자의 부속물로 돕고 남자 선교사의 지도 하에 사역을 해야 한다는 정책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제 선교단체에서는 남녀 구별 없이 능력이나 실력에 따라 동등하게 권리, 자격과 책임이 부여되고 있다. 21세기를 달려가면서 한국 선교에 있어 그것이 부인 선교사이건 독신 선교사이건 간에 다시 한번 한국여성 선교사들의 행정적, 정책적 위치를 재정비 할 필요성을 느끼는 바이다.

5. 여 선교사들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앞에서 초기 한국 선교 역사에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한 여성 선교사님에 대한 고찰을 살펴본 것과 같이 현재 여성 선교사들의 역할이 그 시대의 역할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조선 말 한국의 선교초기 시대와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는, 아직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있는 나라들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차별이 심한 나라들, 즉 이슬람권,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 있는 나라에서는 교육과 의료사역을 아직도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여성과 아이들의 교육 그리고 그들을 위한 의료 사역이다. 다만 과거의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교육적면에서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 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컴퓨터, 예술, 영어 학습, 신학교육 등 이제는 그 나라의 문맹퇴치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통용 가능한 교육이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세분화된 교육과 더불어 여성 계몽운동을 통해 여성 의식 구조 변화, 생활의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전략을 펴 나감에 있어 여성 선교사와 남성 선교사간의 협조와 팀 사역이 중요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 받은 많은 남성 지도자들의 의식에 변화가 있어 여성 선교사에 대한 대우와 생각이 과거보다 개선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등한 사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부분은 현실적인 면이다. 주부 선교사는 현실적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집안일을 보살핌으로 선교에 동참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적극적으로 집 밖의 사역을 하기엔 너무 할 일이 많아 역부족이란 것을 많은 주부 선교사들이 고백하고 있다. 또 독신 여성 선교사는 여자라는 육체적 한계와 외로움으로 인해 많은 위험성 있는 부분을 감수해야 하고 선교 현장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한 탈락과 문제점을 예방하고 방지할 상담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런 현실과 이론의 괴리 속에 지혜롭게 여성 선교사 들이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 여성 사역자들의 문제점을 더욱 연구하고 보안하여 보다 낳은 사역자로 쓰임을 받기 위해 잘 훈련된 사람으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사역자로 개발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여성 선교사들 스스로 선교에 대한 열정 뿐 아니라 지식적, 체계적인 교육과 역사적 고찰을 통해 정체성과 자존감을 확립하고 선교에 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일 것이다